NEXT ACTOR 고아성
풋풋하고 말간 열일곱의 기운과 투정 부리지 않는 단단한 어른의 태도가 공존하는 배우.
〈풍문으로 들었소〉의 새봄, 〈오피스〉의 미례, 〈설국열차〉의 요나,
과격한 혁명가라기보다는 조용한 게임 체인저의 역할을 맡았던 고아성.
- 책 발췌
11p
배우의 성장과 변화, 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작업은 한국 독립영화계와 상업 영화계가 어떤 방식으로 긴장하고 호응하는지, 동시대 젊은이들을 담아내는 이야기와 장르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대형 매니지먼트사 시대가 저문 후 신인 배우들은 어떻게 발굴되고 스타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35p
내 연기가 좀 괜찮았다 싶은 테이크가 있어서 모니터 앞을 기웃거렸는데 너무나 후져서 충격받은 경험이 있다.난 진짜 감정이라고 느꼈는데, 이렇게 가짜처럼 보일 수도 있구나. 몰입도와 상관 없이 결국은 그렇게 보여야 하는 건가, 이 괴리를 어떡해야 하지….
41p
배우의 에티튜드.영화보다 앞서서는 안되고 캐릭터 얼굴 너머로 들켜서도 안 되지만 배우가 작품에 임할 때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의와 태도. 그 태도를 바른 방식으로 거쳐야만, 한 인물이 비로소 오롯이 받아들여지고 결국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한다.영화 <말아톤> 기자간담회에서 초원이 포즈를 취해달라는 취재진의 요청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던 조승우 선배님…
: 대중매체의 예술로 영화를 보게 되는 사람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영향력을 생각해야한다. 인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는 배우와 초원이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초원이 포즈를 취해달라는 기자의 그 요청은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51p
드라마는 정확한 과녁을 파악하고 가는 것. 영화는 서너 개 울타리를 꾸려가는 것.
53p
정성주 작가님께. 작가님을 만나고 나서 저는 약간 불행해진 것 같아요. 봄이가 어려움 끝에 인상이네에 시집오는 걸 허락받고 시부모님이 '너는 이제 이 집안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공부시켜서 검정보시 보러 가는 날, 저에게 주신 대사가 있죠. 시부모님이 은근히 며느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걸 약간 놀리고 싶은 마음을, 봄이가 이제 너스레를 떨 만큼 이 집안에 적응이 되었음을, 그리고 이것쯤이야 하는 자신감까지 모두 표현되는 말. "고졸 딸게요." 대사하면서 이만큼 전율했던 순간이 더는 없었네요.
: 대사 한마디에 담긴 감정과 의미. 장항준 감독님이 '세계관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대본에 대한 독해력이 좋고 인물의 목표(대목표와 소목표), 장면의 목표(내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점들이 바로 이런 지점들일까 싶었다.
58p
영화 오피스 「직원들에게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는 과장. 과장님께 점심식사를 여쭙는 일을 떠맡게된 신입 인턴 미례. 과장은 쓸쓸히 웃으며 괜찮다고 한다. 다시 직원들 무리를 향해 달려가던 미례는 어느 순간 거리에 혼자 놓인다. 어쩌면 일부러 모두 전화를 안 받는 걸지도. 미례는 그저 팔랑팔랑 걷는다.」 이 신을 꼭 찍고 싶어서 이 영화를 하게 되었다면 믿을는지.
절묘한 소외의 전이. 어디서든 숱하게 일어나는 잔인한 사회적 압박.
'신이 멀어 귀신의 손을 잡는다.' 영화의 정체가 구체화되었던 시의 한 구절.
63p
비밀인데, 캐릭터를 살뜰히 마스터하는 노하우는 그 인물을 살짝 우습게 보는 거다. 결국 내가 풀어나가야 할 부담스러운 대상을 귀엽게 여기는 순간, 그 캐릭터는 인간미 비슷한 것을 장착하게 된다. 가령 구석에서 평범하게 자료 정리하는 신에서 지문에다가 '세상 진지하다' 라고 적어두면 내 캐럭터는 남몰래 귀여워진다.
: 책을 읽다보면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대한 고민을 해온 모습들이 보여지는데, 이미지 뿐만 아니라 본래의 모습 또한 성숙하고 현명한 배우라고 느껴진다.
64p
대표되는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되는 정적인 인간상. 그 사람이 걷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당당한 눈빛, 쪽진 머리, 곧은 자세 등 상징적인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그 사람에 다다를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69p
*비트 : 연기 목적을 달성하는 행동의 조각. 연기 행동의 최소 단위.
배우가 구현한 연기의 성취에 접근하기 위해 배우학은 비트(beats)를 그 단위로 삼는다. 연출, 카메라 혹은 편집의 단위인 신과 숏 대신. 하나의 신과 숏 속에 여러 개의 비트가 존재하기도 하고, 하나의 비트가 여러 신과 숏에 걸쳐 구현되기도 한다. 연기 비트의 분석은 영화 비평이 그러하듯 연출자의 목적이나 배우의 해석과 다를 수 있다.
ex) 〈오피스〉 살인을 저지르고 거울을 바라보는 미례
신 - 홍지선을 죽인 범인이 김병국이 아니라 미례임이 보인다. 그러나 죽어가는 홍지선의 눈에 보이는 것은 김병국이다.
고아성의 비트 - 눈에 보이는 칼을 든 육체는 분명 미례지만, 그 정신은 미례인지 김병국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 김병국의 원혼인가, 미쳐버린 미례인가, 찰나와 같은 비트가 안겨주는 혼란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향을 준다.
107p
〈괴물〉 촬영 중 쥐가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너무 야무지게 싹 등장했다가 싹 나갔던 일화에서 -
봉준호 감독님이 "저 쥐 m*m 쥐인가 보다"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m*m연기가 뭔데요?" 물었더니 '저렇게 너무 잘 치고 잘 빠지는 예외 없는 연기' 라고 하셔서 그게 연기의 정답은 아니구나, 했어요.
122p
〈괴물〉 한강 매점에서 밤에 가족들이 함께 밥 먹는 장면에서 -
대본에 다 쓰여 있었어요. '단무지가 길게 늘어진다', '누구는 만두를 먹이고 누구는 물을 먹인다'. … 시나리오대로 비몽사몽한 상태로 일어나 가족들이 주는 걸 하나씩 받아먹었어요. 보통 촬영 끝나면 먹던 것을 뱉기도 하는데 그 음식만큼은 왜인지 뱉지를 못했어요. … 나중에 봉 감독님에게 이렇게 멋있는 장면인지 몰랐다고 하니까 그 장면 때문에 〈괴물〉을 찍은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124p
배우들의 예술적 성취를 가장 잘 끄집어내는 감독인 동시에 콘티 속에 배우의 모든 동선과 행동 하나하나를 정해놓는다는 봉준호 감독. 어떻게 보면 배우가 만들어갈 액션이 없지만 봉 감독님의 영화는 연기하는 재미가 있다. 그 재미는 '행동의 명확성' 에서 나온다. 지문에서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걸 구현하는 배우의 감각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 왼손, 오른손, 얼굴이 나오는 것도 행동의 순서는 있지만 서서히 '현서가 살아있구나' 라는게 드러나도록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봉감독님은 행동의 리듬을 캐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줄을 잡고 올라가는 장면에서, 영차! 영차! 올라가다가 어어? 하고 슥 놓치는 느낌 알지? 이런 식의 디렉팅.
: 디렉팅까지도 감독의 영역. 동선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두었기에 디렉팅을 할 수 있고 배우에게도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구현하는 즐거움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142p
아역배우들이 성인 배우로 변모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 -
칭찬받고 싶어하는 마음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 쉽게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왔기 때문에 어렵다. 어렸을 때는 대사만 잘 외워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그렇게 믿게 된다. 하지만 점점 커 갈수록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능력이 사실은 착시였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자기가 믿고 있던 세계가 부서지며 슬럼프를 겪는다. 자신 안의 세계가 붕괴되는 순간의 당혹감.
: 적절한 표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생각의 깊이가 느껴진다.
147p
각각의 스타일이 있고, 서로 다른 방식이 각자의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될 때, 비로소 영화작업이 재밌어졌어요.
한 배우가 다른 감독을 만나 다른 배우가 되는 것.
147p
선택받지 못하는 것보다 선택할 것이 많지 않은 것에서 오는 무력감 -
옷 안 사준다고 투정부리는 아이, 엄마 아빠가 싸워서 속상한 아이, 행복한 가정에서 하하호호 웃는 아이… 청소년의 깊고 진지한 내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어른들의 눈으로 보는 청소년을 연기해야하는 답답함.
창작자들이 생각하는 어른 여자의 삶, 여성 캐릭터가 진짜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구현하고 싶은 것은 살아있는 사람인데, 진짜 인간을 표현하는 일인데, 영화 속에서는 그런 사람으로부터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다른 무력감이 찾아왔어요.
159p ~
〈항거〉를 찍을 당시 -너무 떨리고 집중도 안되고 그 긴 대사도 기억이 안나서 아, 큰일났다 생각했는데 액션, 하는 순간부터는 진짜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기억이, 컷은 이미 한 상태였고 배우들이 모두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어요.5회차 정도 찍고 모르겠다, 계속 거짓말하는 것 같다고 감독님께 고백했더니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나는 배우들이 안다고 했을 때만큼 불안한 적이 없다. 모른다고 할 때가 더 좋다' 고. 하루는 엄마에게 '유관순은 어떤 목소리였을까?' 물었는데, 엄마가 '애 목소리였겠지' 이러는 거에요. 하긴, 17살이었으니까, 아직 어린 목소리였겠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굳이 성숙한 어른의 목소리, 거대한 위인의 목소리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겠구나.손의 주름, 해진 피부, 고문당해 상한 손톱, 상처 입은 발, 이런 걸 하염없이 보고 있기도 했어요.
〈괴물〉을 찍을 당시 -
길고 복잡한 장면을 두 번이나 테이크를 갔는데, 동선도 복잡하고 연기도 어렵고 감독님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어요. 저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선배님이 "아성아, 이런건 하다 보면 나온다"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너무 안심됐어요. 선배님을 점점 알게 될수록 '편하게 하라' 는 그 말이 결코 단순한 과정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 걸 알거든요. 정말 수많은 경험과 인고의 시간 끝에 나온 통찰이라는 걸요. 제이미 벨이 어깨를 치면서 "존! 이번 연기 너무 좋았어!" 경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도 마흔여섯이나 차이 나는데, 존 허트가 너무 행복해하면서 "고마워, 나 좀 괜찮았지" 이러는데 정말 멋지더라고요. 송강호 선배님이 "외국배우들은 저런 마인드가 있구나" 하면서 신기해하셨어요. 선배님이 연기할 때를 기다렸다 저도 그랬죠. "어우, 선배님 이번 연기 진짜 좋았어요!" (웃음)
〈오빠생각〉을 찍을 당시 -
연기를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매력을 처음 알게 해준 임시완 배우.
저는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내가 마음이 안 갔다고 느끼면 계속 찜찜해하거든요. 그런데 시완 오빠는 촉발 지점을 찾아 결국 자기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어요. 그건 명백한 능력이었어요.
〈라이프 온 마스〉를 찍을 당시 -
정경호 선배님은 너무 완벽한 리더였어요. 동료들이 다 일할 맛 나게 만들어주는 태도랄까. 그래서 이후에 저도 의도적으로 그걸 따라했어요. 이건 자랑인데, 끝나고 스태프분들에게 연락이 왔어요. 너랑 일해서 너무 좋았다, 네가 주연 배우여서 너무 좋았다고.
사실 처음 만나면 누구나 어색하고, 내 할 일 열심히 해야지, 하다가도 결국 모두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란 걸 느끼게 돼요. 그때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모든 면에서 좋아지고 편해지더라고요.
현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현장을 견학하고 온 듯 했다. 선배님들과의 만남, 대화, 연기에 대한 배움, 고민, 스탭들과의 관계, 감독의 디렉팅 등 내가 알지 못했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어 막막함이 조금은 해소되는 기분도 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고아성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성숙하고 단단하고 현명한 배우인지 느껴졌다. 항거와 괴물을 찍을 당시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인물과 영화와 배우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또 한편으로 감탄했던 것은 고아성 배우의 마스크였다. 단단한 마음을 쥐고 있는 듯한 눈빛, 조용하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 말간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영화적으로 정말 좋은 얼굴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