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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ACTOR 박정민

수민 2022. 9. 2. 16:35

 


 이제훈이 연기한 기태의 생글거리는 살가움과 발작적 분노, 극단적 폭력 행사로 이어지는 감정적인 행보와는 완전히 반대다. 박정민이 연기하는 베키의 얼굴엔 살면서 한번도 무언가를 크게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무심함과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난 엄마로 인해 공허함과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기태로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 기태는 아마도 그런 베키가 부럽고 좋았을테고, 그래서 조바심이 났을테고, 결국엔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태가 죽었다. 마침내 베키는 잃었다. 상실의 시대로 진입한 소년은 더 이상 무심한 얼굴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물에 대한 표현이 좋아서 적었다.

박정민에게 파수꾼은 배우의 길을 열어준 작품. 한 단편영화에서 본 박정민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던 감독님은 연기를 알려주면서까지 이 역할을 맡겼다. 본인에겐 파수꾼이라는 작품이 없어도 본인이 곧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랄 정도로 든든한 작품이라고 한다.

단 3-5분 짧은 시간동안 배우를 보여주는 오디션이라는 방식을 비효율적으로 본다는 박정민. 여러 명의 배우들을 한데 모아 긴 시간동안 지친 심사위원들이 집약적인 연기를 판단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그럴 법하다. 본인의 논리가 확실하고 강한 면이 멋있다.

 

 박정민은 몽규에게 문학청년의 과도한 낭만도, 독립투사의 영웅적 비장미도 입히지 않는다. 그보다는 문학의 힘을 믿는 청년의 건강한 활기와 싸우는 투사의 단호한 열정, 부끄러움을 아는 젊은이의 응당한 울분을 통해 몽규라는 인물의 초상을 담담하고 사려 깊게 그려낸다.

〉나 또한 동주을 볼 때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치기어리거나 비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응당한 울분.

 

 "안 슬퍼요. 하나도. 아까 다 쓴 거예요. 눈물을."

 "그래도 이렇게 얼굴이라도 뵙네요, 오랜만에." 「사바하」

 시나리오 상에는 그래도-오랜만에-이렇게-얼굴이라도-뵙네요 의 순으로 쓰여있다. 문장의 요소를 더하고나 빼지 않고 서술의 흐름을 바꾸었다. 대사가 전달해야 하는 큰 목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말의 리듬과 강조점은 달라진다.

 도치법을 쓰면 문장에 생동감을 주게 되는데 대체로 시에 많이 쓰인다. 어쩌면 박정민은 줄곧 시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문장, 생경한 미사여구를 동원하기보다는 일상에서 매일 쓰는 흔하고 너른 말로 쓰는 시.

 

  오디션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짧은 대본으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나를 설득시켜야 하는 작업이잖아요. 분노하고 화내는 연기나 감정적으로 격한 표현을 안 하고 저는 그냥 저대로 차분하게 했거든요. 그래서 눈에 별로 안 띈 건가 싶기도 하고. 어느 순간, 어차피 안될 거 오디션 보는 게 싫어지더라고요. 

 좋은 배우를 단 몇 분의 연기로 가늠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디션으로 보석 같은 배우를 찾는 경우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유실되는 인재들은 또 얼마나 많겠어요.

 작품을 많이 볼 것 같아요. 독립영화, 단편영화 많이 보고. (Q/ 좋은 배우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왓챠 인터뷰에서 박정민은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오디션을 보는 것보다 함께 모여 작업을 하는 것,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있는 방식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오디션이라는 오랜시간 굳어진 관습, 오디션에서 해야하는 연기 방식을 따라가지 않고 본인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는 점이 멋있다.

 

못생겼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되게 촌스럽기도 하고. 진짜 어느 하나 장점이 없네... 엄청 곱슬머리에다가 큰 눈도 아니고 쌍꺼풀도 이상하게 있고 코는 엄청 크고 콧구멍도 엄청 크고 입술도 두껍고.

〉동주에서 나온 몽규의 옆모습을 보면 감탄이 나오고, 점점 박정민에게 빠져들면서 외모가 달리보이는 중에 이런 글을 접했다. 이런 연기력과 매력을 가진 배우도 이런 생각을 가지는구나. 위안이 되는 이야기였다. 크게 다르지 않다.

 

Q/ 「파수꾼」에서 "나는 언제부터 선택권이 있었냐?" 같은 대사를 비롯해 영화에서 굉장히 분노할 만한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가 큰 편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요. 겉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거죠. '표현을 하는 순간 들킨다'라고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화를 낼 때 그렇게 표정 변화가 많을까요? 게다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잖아요. 저 새끼가 빡칠 상황이라는 걸.

이미 설명하고 있어요, 영화 자체가. 쟤는 화가 났어. 지금 화가 나는 상황이야. 정보가 이미 들어가있는 상황에서 배우가 얼굴로 가정으로 화를 막 내고 있으면 관객이 거기에 대한 동질감을 느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저는, 아니다 쪽에 항상 표를 던지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 사람들은 감정 표현을 잘 안해요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다 표출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너무 신나도 이 상황이 편하지 않으면, 그 기분 좋고 신나는 걸 잘 드러내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표현하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표현하지 않는다는 선택.

 

 "정민이 참 열심히 하지." 이 말을 영화계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어요.

육체적으로 단련시켜놓는 것이 결국 저의 감정에 엄청 도움이 돼요. 그 근육을 단련시켜놓지 않으면 카메라 앞에서 몸을 움직이다가, 합을 맞추다가 끝나버리거든요.

〉몸에 익혀 놓는 것. 평소에도 생각날 때마다 진태처럼 걷고. 몸에 붙여 놓으면 촬영장에서 걸음걸이를 신경쓰지 않아도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해서 연기할 수 있다.

 

 피아노 치고 있는 손에서 컷 없이 그대로 카메라가 올라왔는데 그걸 진짜 치고 있는 배우의 얼굴이 있으면 그 신에서 관객이 느끼는 에너지가 다르단 말이에요. 그 순간 관객들은 다른 경지의 감동을 받죠. 정말 저 배우가 한 거라고? 그 기쁨을 놓치지 못하겠어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임팩트라는 게 무시 못 하는 거니까.

〉관객의 입장에서 장면을 보는 눈. 그리고 장면에 대한 욕심.

 

"말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관객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잖아요."

"그래서 대사가, 대사의 전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대사를잘 외우지 않을 때도 있어요. '내 글은 금방 잊힐 거다' 라는 대사가 있으면 '글', '잊힐 거야' 정도의 맥락만 외워놓는 거예요. 시나리오에 있는 글자 그대로 대사를 외워버리면, 카메라 앞에 서서 그냥 글씨의 까만 색이 떠올라요.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안 돼' 하는 감독을 만난다면 모를까, 보통은 맥락을 정확하게 외워놓고 상대에게 말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계산하지 않아도 볼륨 조절이 자동으로 되죠. 

학교 연기 수업에서는 볼륨을 7,6,3,2로 리듬을 빠방 빱 빱 빠바 밥. 뭐 이렇게 배워요. 근데 그건 별로 안 좋다고 봐요. 

〉배우들은 자기만의 연기 방식을 만드는구나.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더라도 본인이 생각하는 연기관대로 연기한다. 내가 했던 디자인을 생각하면 나는 졸업하고 나서도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정석대로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만들어가는 방향도 있는거지. 디자인이나 연기나 정답이 없으니까.

〉 사실 우리는 말을 할 때 적혀진 대사처럼 정해놓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을 하듯 하려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연기의 방식

 연기를 하면 제 여러 모습들을 찾으려고 애를 써요. 이 캐릭터는 내가 누구를 대하는 모습과 가장 닮았는가. 그 접점을 찾아내서 확장시키는거죠. 

 Q/ 그 뜻은 나라는 사람의 행동이나 상태를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되는 거겠네요?

 평소에는 별 생각을 안하다가 그런 기회가 생기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거죠. 모든 데이터는 제 안에 있으니까. 

 제 안의 것들을 찾아가요. 내가 옛날에 누군가를 만났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 그랬던 거 같은데? 여행 갔을 때 어떤 사람 앞에서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것 같은데? 그런 걸 계속 찾아가면서 그떄의 것들을 기억해내려고 노력을 하죠. 그렇게 찾은 점을 하나 딱 찾아놓으면, 그대로 시나리오를 읽어가요.

 Q/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장르로 갈수록 접점을 찾기 힘든 캐릭터들이 늘어날 텐데요.

「사바하」같은 경우는 너무 어려웠죠. 정말 이 인물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살면서 정말 죽이고 싶었던 자식이 하나 있었거든요. 내가 쟤를 죽이고 감옥에 가야지, 생각할 정도로. 그때 분노에 가득 차서, 저걸 어떻게 죽이지? 이런 생각까지 했단 말이죠. 범죄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보고. 그런데 오히려 감정적이 되기보다는, 이놈을 어떻게 죽이면 내가 들키지 않고,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모든 걸 계산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하면 소름 끼칠 때가 있거든요. 그 순간 제 모습을 빌려왔어요. 그랬더니 나한이라는 인물이 정말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거예요.

Q/ 하지만 나한은 동시에 어떤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혹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방금 말한 게 인물의 온도나 외적인 거라면, 캐릭터의 정서를 잡을 땐 사실 이게 더 어렵죠. 저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절대자를 맹목적으로 믿었는데 이 절대자가 나를 배신해서 막 폭주한다? 이건 저에게 쉽지 않은 일인 거예요. 살면서 그렇게 큰 실망이나 배신을 당해본 적도 없고 울어본 적도 없고. 어디부터 시작을 해야 되나 고민하다 그냥 막 파고들었어요. 얘가 왜 이렇게 울지? 왜 이렇게 슬퍼하지? 결국에는 엄마더라고요. 누구의 보살핌도 받을 수 없었고, 보호자라고 나선 사람도 결국 나쁜 짓만 시켰죠. 악행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믿으려고 한거고, 믿으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차가워진거죠. 막 꿈에서 죽은 아이들이 나오고 헛것을 보고, 이럴 때마다 엄마를 찾아요. 나한이란 인물은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안 행복한 역할을 하는 배우 개인의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방법]

일상생활에서도 나는 이 인물로 살아야지, 생각을 안해요. 몸의 습관은 붙여도 그건 그냥 근육에 붙여놓는 거니까. 감정적인 부분까지 계속 그 캐릭터로는 못 살아요. 그렇게 살면, 촬영을 못해요.

내가 일상생활마저 철저하게 캐릭터로 살고 있어,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못해버리면 어쩔거예요. 그렇다고 모든 걸 다 내려놔버리는 것도 아니거든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도 아, 맞다 나 「시동」 찍고 있지, 이럴 때 택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도로 끈 하나 부여잡고 있는 거예요. 

 

Q/ 배우가 캐릭터에 자신의 방식으로 접근한 이후, 현장에서 감독의 해석과 다를 수 있잖아요.

나한이라는 캐릭터의 주된 정서가 슬픔이라는 것이 일단 통했고, 감독님께서 감정이나 행동에 대한 것을 지정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민이 준비해온 걸 보고 볼륨 조절을 하는 정도.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에 충분히 시간 갖고 해볼래요? 정도 였고 감정선을 같이 잡아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Q/ 그동안 작품에서 아예 틀린 해석으로 캐릭터가 현장에서 뒤집힌 경우는 없었어요?

감독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다른 해석이 있다. 그땐 '그건 아닌데요?' 하는 태도보다 '그렇다면 이런 것도 해볼까요?' 하고 여러가지 버전을 준비해간다. 물론 대부분 나의 해석이 틀렸을 것이다. 감독님들은 전체를 보시는 분들이니까. 그래도 어쨌든 나중에 편집실에 가서 그중에 몇개라도 쓰일 수 있을거라 믿으며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그건 배우로서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선 해볼게요" 하면 감독님들은 열이면 열 거의 "해보세요"라고 하세요. 그렇게 보여드리면 "좋은데요" 하는 분도 있고 "괜찮은데 다른 것도 해볼까요?" 하는 분도 있고.

그렇게 서로 맞춰가요. 그런데 웬만하면 감독님 그림이 맞다고 판단을 해요. 그런데도 제 해석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동시에 더 좋은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보자는 거죠. 

 

[에너지의 배분]

저는 영화의 주인공이지, 매 신의 주인공이 아닌데 매 신마다 주인공처럼 연기하려고 할 때가 있어요. 타 배우의 장면까지 다 잡아먹어야지 하는게 아니라, 그냥 이 영화가 잘 돼야 되니까 난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작 그 신을 메고 가는 인물이 내가 아닌데도, 굳이. 

박정민이 다쳤을 때 황정민이 박정민에게, 불도저처럼 가는 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며 오래 하려면 컨디션을 조절해야한다고, 영화 같이 하는 사람들한테는 민폐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황정민]

촬영할 때 오케이가 나도 무조건 한 번 더 해라. 대신 조금 다르게. 그건 배우가 감독에게 주는 선물이다. 

영화 시나리오가 한 권의 책이라고 했을 때, 네가 남한테 선물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출연하고 아니면 하지 말라.

현장에 무조건 남들보다 빨리가라.

밥 먹을 때 감독님들 스태프들 피디님 배우들 다 네가 챙겨라.

저는 사실 누구를 챙기는 성격의 사람이 아닌데, 정민이 형이 나름의 이유를 대면서 그렇게 하시니까. 또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니까, 따라하는거죠. 제 행동이 영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장 분위기에는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이병헌]

보통 모니터를 보고 내가 잘했나? 못했나? 정도만 체크하는데, 이병헌은 잠깐 모니터를 한 뒤 이미 좋은 앞 테이크를 토대로 살짝만 바꿔서 다음 테이크를 연기해요. 근데 그 테이크가 전 테이크보다 훨씬 좋아요. 아주 미세하게 바꾸는데도, 고갯짓 한 번, 손짓 한 번의 변화에 다 다른 효과가 나와요. 근데 그 조금씩 다른 테이크들이 영화로 보면 모두 다 잘 붙는 거예요. 마법같은 시간들이었어요.

 

[류승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물론 하기 싫다고 안 하지는 못하겠지만, 하기 싫다고 얘기도 할 줄 알아야 돼. 그렇게 네가 풀려야지, 그게 영화를 도와주는 길이야"

배우는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기하기 전, 배우 자신의 마음은 풀려있어야 한다.

 

관객들만 생각하는 현장. 관객들은 이런 거 안 좋아해, 하면서 움츠리는 분위기.

'그러니까 어쩌라고? 그래도 새롭고 재밌는 걸 만들어야지!' 하는 쪽으로 의견을 내기도 해요. 개인적인 하나의 목표라고 한다면, 듣도 보도 못한 것들로 관객들을 즐겁게 만드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한 편의 영화가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려할 것이 많지만 얘기해보면 감독님들, 제작자들, 스태프들, 배우들 그들도 다 눈치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