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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책을 읽는 지하철에서 눈물이 알랑알랑거려 곤혹스러웠던 때를 만들던

소설가와 시인의 안온한 대화


5p

잃어버린 것에 관한 생각의 파도는 자연스럽게 잃어버려선 안 되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에 가닿지요.

 

13p

너도 알지, 병이란 소모적인 것임을. 몸과 마음을 소진하고 이기적인 성향은 그 어느 때보다 짙어지지.

 

15p

스크린 안 '배우' 추상미는 아픈 기억을 떠올린 송이가 여행의 목적을 잊은 채 배회하는 것을 내버려두었고, 스크린 밖 '감독' 추상미는 (아마도) 송이의 고백으로 물들였을 어느 밤의 이야기를 필름에 담지 않았어. 추상미는 이 지점에서 진정 존경할 만한 예술가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그건 배우이자 실존 인물인 송이에 대한 예의가 고스란히 전해져서였어.

 

16p

우리의 생각이나 신념은 가변적이지. 어제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침과 저녁 사이에도 우리는 유빙인 듯 먼지인 양 생각과 생각 사이를 표류하는 존재들이니까. 고민하고 방황하고 배회하는 과정 안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인간일 테니까.

 

35p

외로움과의 사투는 변덕을 초래하더라?

: 어떤 감정이든 고독스럽게 사투하는 감정은 변덕을 초래하는 듯 싶다. 감정을 내비치고 나눈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꾹꾹 눌러담아 곧 터질 듯하게 빵빵해진 마음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36p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는 것이 외로움과 잘 사귀어 지내는 방법이더라.

 

37p

호기심으로, 동심으로, 모험심으로, 다정함으로 가득 찬 얼굴이 해내는 거더라. 시작부터 외로움을 이겨내. 놀랍게도 응원하게 되지. … 목소리를 잃은 청소부 엘라이자 역을 맡은 샐리 호킨스가 말 없이 눈빛만으로 너는 누구니, 어디서 왔니 하고 물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에게 다가갈 때 보는 이들은 무장해제 되고 말아. 그 얼굴이 이미 사실이니까. _「패딩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38p

인간의 우울은 인간의 다정함 앞에서는 쉬이 휘발되고 말지.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다정한 인간을 가까이 두고자 끝도 없이 사랑과 우정을 찾아 헤메는 거겠지. 그 온기를 나누어줄, 나누어 가질.

 

54p

축하 노래가 끝날 즈음, 나는 깨달았어요. 내 삶에 많은 날이 이 순간의 온기로 보호받으리란 것을요.

 

56p

현, 일전에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언급한적이 있죠. 기원과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물고기와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배합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생명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엘라이자의 눈빛에 대해서 말이에요. 눈빛엔 교환의 속성이 있잖아요. 엘라이자의 눈빛에 호응하듯 물고기 인간 역시 있는 그대로 엘라이자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이 교환되었을 때 사랑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엘라이자는 누구보다 용감했고 그 사랑의 결말에 겁을 내지 않았죠. 기꺼이 욕실을 물로 채우고는 물고기 인간과 둘이 하는 사랑을 배워가던 그녀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갈퀴나 아가미, 비늘 없이도 물속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 그것은 환대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 행운일지도 모르겠어요.

 

62p

마음을 합쳐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우정은 언제나 여름의 것. 

- 「굿바이 마이 프렌드」

 

63p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계절과 날씨는 인물의 심사를 자주 대신합니다.

 

71p

생일을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어.

하나는 많이 울지 말자는 다짐. 왜냐하면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공간도 희소하니까, 유가족이 울 때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 사회를 비판한 적은 있지만 내가 그 시선과 싸웠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나머지 하나는 생일」은 상업영화이므로 대중적인 요소가 있을 수 밖에 없을 텐데, 절대로 그 요소에 감응하지 말자는 다짐. 그러니까 배우의 연기나 카메라가 비추는 전경,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과도한 감동을 끌어내려는 감독의 욕심같은 것에 평가를 삼가고 휘둘리지도 말자고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 선하고 곧은 마음.

 

75p

살아 있다는 감각은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랑하는 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고, 광활한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만 느낄 수 있는게 아니죠.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고, 구둣발에 발을 밟히고, 불길에 휩싸인 역사의 유물을 보며 탄식할 때도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79p

영화 생일은 수많은 이름이 떠오르도록 합니다. 영화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부르고자 애쓰는 영화가 근래에 또 있었나요? 호명이라는 행위를 통해 생일은 과거를 재현하지 않고 현재를 목격하게 합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앞으로 살아가게 될 사람들을요. 

맞아요, 누나.

누나와 저는, 우리 모두는 모두 한 배에 타고 있습니다.

 

84p

우리 중 누가 은희와 그 두부 가게 부부의 외면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누가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그 선택을 완벽하게 대상화할 수 있을까.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목격했을 때 외면하거나 움츠러드는 연약한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심지어 그 사람이 평소와 달리 조금 더 외롭고 조금 더 슬퍼 보여도 우리는 뒷걸음칠 때가 있잖아.

: 마음을 내어 우리 모두 그런 순간이 있지 않아? 라고 했을 때 아니, 난 안 그런데? 하는 사람의 빳빳한 자기만족은 얕고, 밉다.

 

85p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과 이어지는 '피하다'라는 동사는 어쩌면 편한 방식일지도 몰라. 나 역시 삶의 많은 순간에 그 방식을 택했고,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상기하려고 해. 그 방식이 최선은 아니란 것을.

 

90p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은 또 어떤가요. 기차가 서로 스쳐지나갈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이들의 걷는 이야기를 통해서 영화는 기적을 향해 걷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라고 전하지요.

「여인의 향기」에서 두사람은 함께 걸음으로써 각자의 삶 속에 깃든 빛을 찾아냅니다. 자살을 결심한 프랭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자 찰리는 대답하지요. "당신은 누구보다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몰잖아요" 

 

91p

걷는다는 건 불편하지 않은 다리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멀쩡한 두 다리로 걷는 것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지요. 이동권 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선 장애인들을 향해 "병신들이 설치고 있네"라고 욕설을 퍼붓는 이들은 정말 제대로 걷고 있는 걸까요?

 

106p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늘 시적일 필요는 없다.

 

111p

너는 썼어, "우리 모두의 이름은 언젠가 한 존재가 타인을 위해 진심을 담아 건넨 최초의 말" 이라고. 내 이름은 해진, 네가 생에서 진심으로 받은 첫인사가 '밝은 현'이듯이 나는 '바다의 보배'라는 다소 거창한 인사를 받은거지.

 

125p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작품성을 떠나 스크린 바깥의 것들로 기억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영화를 본 극장의 분위기, 누군가와 함께이거나 혼자 그영화를 볼 때의 마음, 몰입된 장면에서 환기되는 나의 어린시절, 그리고 엔딩곡과 자막을 신호로 현실의 스위치가 켜질 때의 아연함 같은 것들로.

 

126p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제목이 '벌새'일까 생각했습니다. 저와는 다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는 신미나 시인에게 그 이유를 아는냐고 물으니, 벌새는 새 중에서 가장 작고 초당 80회가 넘는 날갯짓을 한다는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벌새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좋앗다는 말도 해주었죠. 그제야 감독의 의도를 조금은 알 것 같더군요.

 

128p

철원 읍내의 극장들을 순례하며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기를 자청한 김현과 서울의 강서 지역에서 뜨거운 얼굴을 숨긴 채 어서 학교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으로만 버티던 나, 우리는 생의 어떤 모서리에서 같은 영화를보며 같은 표정으로 같은 생각을 했으리란 것을요. 웃음의 결과 울음의 자세가 같았다는 것도요.

 

132p

"제 인생은 빛이 날까요?"라고 붇던 우리, 은희는 이제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라는 영지 선생의 말을 자신의 빛으로 삼게 되리라는 것을요.

 

134p

한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쓴 편지를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해 읽는 일 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겠죠.

 

146p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건 세상을 사랑하는 그 방법이다.

 

150p

… 찍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 대신에 필름 카메라를 더 선호하는 사람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밤 9시만 되면 물구나무를 서는 사람은, 인적 없는 숲속 호수에서 훌훌 벗고 수영하는 연인들은, 세상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연대자는, 무엇보다 작은 동전 지갑을 선물 받고 작은 동전 지갑을 선물하는 두 친구는 '동 시간대'라고 간단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간의 빛깔을 다채롭게 합니다.

 

165p

저 세상에 사는 이에게 연락해보고 싶어 마음의 개펄에 발이 쑥쑥 빠졌지요.

 

모모님의 단짝도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모모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오늘은 달빛 창가에서 친구에게 타전해보는 겁니다.

: 연락해보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마음의 개펄에 발이 쑥쑥 빠지다는 표현이 너무 내 마음과 같았다.

 

177p

이 시는 열여덟 번의 여름을 아는 한 사람이 단 두 번의 여름을 알았을 뿐인 죽은 개를 떠올리며 적은 시입니다. 죽은 생물을 그리워하는 생물의 사연은 모르긴 몰라도 대체로 무척 처연하지요? 그런데 이 시는 그런 쓸쓸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삶의 생동을 감각적으로 전달하지요. 죽은 개의 침묵과 새롭고 무한하게 넓은 여름이 온다는 인간의 말이 어우러지면서 읽는 이의 마음을 똑똑 두드립니다.

 

185p

저는 관념으로서의 사랑이라면 때때로 믿고 때때로 믿지 않지만, 상대를 웃게 해주고 싶은 순간의 마음이라면 그 분명한 실재를 백 퍼센트 믿습니다. 그 마음들은 지속적이지는 못할지언정 간간이 깜빡이겠죠. 그리고 저는, 그 깜빡임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사랑보다 덜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인간인 우리가,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는 될 수 없어도 아름답게 살다가 죽는 건 가능하듯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글을 작성하려하면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을 빼는 것이 어렵다. 이것도, 저것도, 이래서 좋았고 저래서 좋았는데, 많이 적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걸 나중에 다 보는 것도 아니기에 줄이려 노력한다. 이 책은 선하고 솔직한 마음들이, 그리고 그에 대한 표현이 좋았다. 세상이든, 마음이든, 내가 가진 것보다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주는 문장들이었다. 보고싶어요 리스트에 넣어두긴 했지만 보지 않고 있던 영화가 보고 싶어지기도 했고, 새로 알게된 영화, 제목만 듣고 지나쳤던 영화들이 보고싶어졌다. 오늘이나 내일은 벌새를 볼 예정! 좋았지만 소화가 필요한 글이었어서 오래 걸린 듯 싶다. 한달은 넘게 걸린 듯. 다음 책은 소설이나 재밌는 책을 읽고 싶은데, 지식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대사 책을 읽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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